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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드라마와 실존 인물의 차이점. 본문
최근 어쩐지 99년판 드라마 허준이 보고 싶어져서 다시보기로 며칠 밤잠 줄이고 다른 취미생활 포기하며 감상했습니다. 감상을 마치고 여운을 느끼며 드라마 명장면을 떠올리던 중, 문득 실제로는 허준이란 인물이 어떠했고 그 시대 배경은 어떠했는지, 드라마에서 얼마나 각색하고 변질시켰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져서 열심히 백과사전을 열람해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습니다. 요즘은 워낙 인터넷이 발달하고 자료가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되어 있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이나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등을 컴퓨터로 편히 들여다볼 수 있어 좋더군요.
이 글은 대학 레포트나 논문마냥 정리된 글이 아니라 눈에 띄는 부분만 간추린 것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재미로 읽어주세요.
1. 허준의 어머니, 허준의 신분.
드라마 허준에서는 허준의 어머니가 미천한 관노비 출신으로 허준의 아버지인 허륜을 모시는 것으로 그려지나 실제 역사 기록에는 양반 가문의 여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허준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라 중인 계급이었던 이유는 허준의 어머니가 허륜의 정실이 아니라 첩이었기 때문. 왕자조차도 정통 왕비가 낳은 아들은 '왕자대군'이라 하여 왕실 정통의 피를 잇는다 여기고 첩의 아들은 '왕자군'으로 부르며 후계자 대우를 못 받던 시절이니 양반의 아들이지만 첩의 자식인 중인의 대우는 더욱 형편없었습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거진 천민이나 다를 바 없이 나오는데 이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이미지를 허준에게 갖다 붙인 탓으로, 실제로는 중인이지만 풍족한 생활과 충실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2. 서자 출신은 과거시험 대과에 응시할 수 없다?
드라마에서는 허준이 자신의 신분 한계에 절망하며 비뚤어져 밀무역을 하고 타지방으로 도망가서 양반의 여식과 몰래 결혼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중인 신분도 대과에 응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예를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역사 속 실존 인물이었던 허준의 친동생 '허징'이 바로 중인 신분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정3품 목사까지 올라갔으며 영의정의 딸과 혼인한 인물입니다. 정3품 당하관까지만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중인 출신의 한계(경국대전 규정)이지만 대과 응시는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과거시험은 양반들만 볼 수 있다고 알려지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답안지에 5대 조상의 이름과 관직을 적어야 했기에 어지간히 출중하지 않으면 집안 수준만 보고 걸러지는 탓도 있었고, 공부를 하려면 사교육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 양반 가문이 아니면 부담이 컸기 때문이죠.
3. 허준은 잡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 속 허준은 양반 가문의 의과 추천을 받았으나 스승 유의태가 추천장을 불태워버려 훗날 직접 잡과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했다고 표현되지만, 실존 인물 허준은 정말로 추천만으로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낙하산으로 출세한 인물입니다. 물론 능력도 없는데 무작정 추천되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유학자 유희춘의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해 유희춘의 신임을 얻고 그가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한 것이니 의관이 되기 전부터 그의 의술은 양반 가문의 사람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4. 스승인 유의태는 허구의 인물.
허준이 고향 땅에서 도망가 정착한 고을에서 만났다는 유의태라는 의원은 실존하지 않는 작품 속 인물입니다. 실제 허준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지도 않았으며 스승을 섬기며 의술을 익혔다는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명문가 아들이었던 허준이 누군가에게 사교육을 받았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유의태라는 인물은 아닙니다. 2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드라마 속 주역으로, 항상 허준을 시기하고 매사 대립하는 라이벌로 표현되는 유의태의 아들 유도지 역시 허구의 인물인 것입니다.
5. 윗선에 찍혀 혜민서로 쫓겨나고 출세길이 막혔었다?
드라마에서는 허준이 수석 합격했으나 간신배들의 수작으로 종8품이 아니라 종9품의 품계를 받고 생지옥인 혜민서로 발령 났다고 나오지만, 실존인물 허준은 이조판서의 추천을 받은 빽이 든든한 인물이었던 탓인지 초고속 승진하며 1569년 추천받아 들어간 허준이 1578년엔 종4품 첨점이 되었고, 한동안 기록이 뜸하다 1590년에는 출신 성분의 한계를 넘어서 정3품 당상관으로 올라갑니다. 이후로도 계속 승진하여 호종공신, 종2품 가의대부, 호성공신 양평군,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오르고, 선조가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삼으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지만 사후 광해군의 명으로 결국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되기에 이릅니다.
6. 어의 양예수의 견제를 받았다?
작중 허준이 당상관이 되기 전까지 의관들 중 유일하게 빨간 관복(정3품, 당상관 이상이 입는 관복)을 입고 등장하는 의관인 양예수는 유도지와 같은 타입의 인물로 윗선에 굽신거리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능력 있는 유의태나 허준을 견제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존 인물 양예수는 허준과 함께 동의보감을 집필하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일설에는 허준이 의관이 되고서 허준의 스승 역할을 맡았을 인물로 양예수를 거론하기도 하며, 실록에도 허준과 함께 선조를 진료한 기록이 존재하기도 하니 드라마처럼 서로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리 서자라고는 하나 집안도 든든하고 이조판서라는 빽도 있는 허준을 괜히 건드려서 좋을 이유가 없었을 테죠. 본인 스스로도 이미 충분히 높은 품계인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위치에 있는데 굳이 앞날 창창한 젊은이의 앞길을 막는 소심한 행동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마치 회사 이사급 인물이 신입사원이 똘똘하고 일 잘 한다고 경계하는 꼴)
더불어 무능하며 윗선에 굽신거리는 김응택이란(처신 잘못해서 혜민서로 쫓겨나나 거기서도 정신 못차리던) 인물도 실제로는 1596년 허준과 함께 광해군의 병을 치유하고 함께 동의보감 저술하기도 했으니 드라마를 통해 심하게 왜곡된 사례에 해당합니다.
7. 선조 승하 후 관직에서 쫓겨나 귀양을 다녀온 뒤 복직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는 선조가 사망한 책임을 물어 유배되고 그곳에 오래 머물며(작중 유배 기간 동안 수염이 완전히 새하얘지는 것으로 표현) 동의보감을 마무리 지은 뒤 그 공로로 광해군이 복직을 시키려고 하나 허준이 거절하고 낙향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1년 8개월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광해군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동의보감을 완성합니다.
실록을 살펴보면 광해군 원년 3월 많은 관원들이 허준을 귀양보내라 청하나 광해군이 허준을 감싸며 거절하고 거절하다 끝끝내 대신들의 뜻에 밀려서 가까운 곳으로 귀양보내게 되지만, 그 이후로도 허준을 가중처벌해달라는 요구가 쏟아지나 이는 광해군이 전부 거절하죠. 광해군 1년 11월에 광해군이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며 풀어줄 것을 명하고, 또다시 많은 관료들이 명을 철회해달라 요청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병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결국 허준을 불러들입니다.
동의보감이 완성된 것은 복직한 다음 해의 일로,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는 광해군의 어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직을 버리고 은퇴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광해군 7년에 사망하고 광해군의 명으로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되는 것이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 밖에 집안 좋고 빽 있고 출세가 빨랐던 허준이 드라마처럼 도망다니고 궁핍하게 살며 식솔을 돌보지 못하던 것과 달랐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출세가 빨랐다는 것은 드라마처럼 우직하게 병자들만 돌보며 의술을 펼치는 것과 달리 어느 정도 윗사람들과 사석에서 어울리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승진 기회를 잡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정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네요. 그 인물의 이름과 직업만 동일할 뿐 살아온 인생과 인물 관계가 전혀 다른 딴세상 이야기인 겁니다. 드라마나 원작이 된 역사 소설은 그저 재미로 봐야지 그것만 보고 역사를 배웠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