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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오피스텔 관리인 선출을 위해 선관위 활동했던 이야기. 본문
- 건물 하나 둘러싼 지저분한 주인자리 쟁탈전 -
1. 오피스텔 선거관리위원장이 되다
저는 2년 전에 어느 큰 오피스텔(700세대 규모) 건물의 '관리인(아파트 입주자대표와 유사한 집합건물법 규정 대표자)' 선출을 위한 선거관리위원을 했었습니다. 그것도 위원장으로 말이죠.
사실 젊은 나이에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저도 딱히 하고 싶어서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쪽으로 이권이 걸린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선관위 발족 머릿수 채우러 들어간 것인데, 똑같이 머리 채우러 들어와서는 선거 진행에 아무런 의지도 없고 괜히 골치아픈 일 하기 싫은 아줌마들에게 떠넘겨져 위원장까지 하게 되었던 겁니다.
선관위가 발족한 이후에는 당연히 선거를 위한 준비는 선관위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세대 명부나 우편 발송, 선관위 운영을 위한 자재구입, 비용 등만 관리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고 바람직한 선관위의 운영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오피스텔의 선관위에게는 그런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입주가 시작하고 2년이 지난 시점까지 관리인 자리가 공석이고 관리단이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매우 기묘한 일이었는데 그 이유를 저는 선관위에 몸담고 3주가 지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관리실 실장(이하 '실장')이 공석인 관리인 대신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모든 것을 쥐락펴락하고 있던 겁니다. 이상한 건물관리규약을 근거로 관리인이 선출되지 못하게 방해하고 본인들 입맛에 맞게 해석한 집합건물법을 운운하며 능구렁이 같은 교묘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반인들은 건물관리규약을 꼼꼼이 뜯어 보지 않고 집합건물법이 뭔지도 모르기에 실장이 법이 어쩌니 몇 조 몇 항이 어쩌니 떠들어대면 내용이 어려워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겁니다. 1
이런 상황 속에서 구성된 선관위... 아무 의지도 없으면서 그냥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좋은 동네 아줌마1, 졸부 아줌마2, 그리고 등떠밀려 위원장이 된 저. 처음엔 실장에게서 "건물규약이 이러이러하고 집합건물법이 이러하니 이렇게 진행합시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의지할 건 실장님 뿐이구만...' 하고 생각했던 1주차 파릇파릇 새내기-어리석은 꼭두각시- 위원장이었던 저였습니다만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면서 저는 점차 선관위 활동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아줌마 위원장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저 실장 말만 따르고, 저도 거기에 그냥 질질 끌려다니기만 할 뿐이었던 겁니다. 선관위 회의 일정도 실장이 정하고 의결 내용도 실장이 자기 주장만 싹 모아서 프린트한 것을 보여주니 아무리 처음에 자리 채우러 들어갔던 저라도 심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2. 관리실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던 입주자 A씨
한편, 선관위가 발족하기 직전 오피스텔 관리인 자리를 얻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오피스텔 지하 상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직접 점포를 운영하던 A씨는 관리실의 건물관리능력과 실장의 능구렁이 같은 행동에 2년 간 큰 불만을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본래라면 관리단이 처리해야 할 일을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실 실장이 임의처리하던 것이 매우 많았는데, A씨가 요청하는 일에는 사사건건 거부하며 관리실 권한 밖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반복되자 결국 A씨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하고 스스로 관리인이 되어 관리실을 쫓아낼 생각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주민 명부는 관리실이 움켜쥐고 있고, 작은 평수 오피스텔이란 특성상 상당수의 소유자가 직접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임대를 주는 임대인들이기에 주민들의 뜻을 모아서 관리인에 선출되기 힘들다는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럼에도 A씨는 인근 부동산에 협조를 얻고 다방면에 수소문수소문하여 어떻게든 무(無)에서부터 직접 주민 명부를 만들어가며 주민들에게 의결권 위임 우편을 보내고, 인근 거주자들에게는 직접 찾아가 서명을 받기까지 합니다.
실장이 이러한 소문을 듣기까지는 썩 오래 걸리지가 않았고, 2년 간 관리단 관리인 자리가 공석인 상황을 고의로 만들어냈던 실장이 자기 머리 위에 앉을 관리인 선출을 위해 선관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던 겁니다. 선관위가 들어서면 자기를 내쫓으려는 A씨가 수집하고 있는 관리인 선출 위임장은 불공정 선거 운동이라 규정하여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실장은 선관위 회의때마다 조언을 하는 척 참석하면서 A씨라는 인물에 반감을 갖게 유도하는 발언을 1시간씩 쏟아 내기도 하며 선관위 활동보다도 A씨 규탄회라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상황으로 만들었고 아줌마 선관위원들은 거기에 끌려갔습니다.
이 흐름을 끊은 것이 그저 서명만 하던 이름만 위원장이었던 저였습니다.
3. A씨의 의결권 위임장을 유효하게 지켜내다
저는 선관위 위원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선관위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주민들에게 의결권을 받아내고 있는 행위를 불공정 선거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무효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은 사람이었다면 말이죠.
실제로 실장이 유도한대로 회의가 진행되고 실장이 용이주도하게 미리 만들어둔 회의 결과문에 따라서 '불공정 선거 운동을 중단하고 앞으로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 각서를 제출할 것, 이를 A씨에게 내용증명으로 보낸다'라는 회의 결과가 통과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저는 계속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머릿수 채우러 선관위에 들어온 내가 내 이름으로 내용증명 발송까지 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지, 실장은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는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를 확실하게 알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낀 겁니다. 실장이 굳이 내용증명이라는 호들갑까지 떨지 않았다면 저는 기존 태도를 고수하며 그저 서명만 해주고 생각하기를 관뒀겠지만 너무 오버해버린 실장의 행동 덕분에 저는 실장의 꼭두각시인 것을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우선 건물관리규약을 꼼꼼이 들여다보니 '입주자가 입주자에게 의결권을 위임받아 대리행사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항목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밖에도 법률과 사례를 찾아 보아도 선거 불공정 행위라 규정할 타당한 근거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주민들 한 명 한 명을 직접 찾아가고 연락을 돌리고 우편을 보내며 설득하고 설득해 얻어낸 정당하게 위임된 의결권을 선관위에서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저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던 선관위 아줌마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임시 회의를 하며 이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그냥은 갈피를 못 잡던 이분들이었지만 "우리는 A씨와 실장 싸움에 끼어 있을 뿐이고, 우리를 시켜서 A씨와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괜히 우리가 내용증명 보내며 일 크게 만들면 나중에 A씨랑 실장이 소송전까지 갈 경우 우리도 말려들어 골치아파진다." 라고 살짝 겁주듯 전하니 귀찮은 일 하기 싫은 아줌마들에게 바로 와 닿았는지 제 의견을 따라서 '의결권 위임 요구 행위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고 선관위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는 실장이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회의 결과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4. 관리실장의 속내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실장은 단독으로 주민들의 의결권을 위임 받아 관리인이 되려는 A씨를 견제하기 위해 선관위를 급조했지만, 그렇다고 입주가 시작되고 무려 2년만에 구성된 1차 선관위를 통해 관리인을 선출할 생각 역시 티끌 만큼도 없었습니다. A씨가 가지고 있는 위임된 의결권을 무효화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른 관리인이 당선되면 자기 위치가 위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꼭두각시 선관위를 만들었고, 엉성한 선거 일정을 짜고 주민 홍보도 어설프게 하여 의결수 부족으로 선거 무효가 되는 상황을 노렸습니다.
마침 이 오피스텔의 건물관리규약에는 실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항목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소유자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는데요. 사실 이는 집합건물법에서 '점유하는 자(세입자)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부분과 완벽하게 상충하는 부분입니다. 시공사측에서 자기들의 관리업체가 오래 해먹으면서 최초 관리단을 구성하기 힘들게 만들기 위해 넣은 악의적인 조항이었던 것이죠. 건물관리규약을 고치려면 관리단 의결을 거쳐야 되는데 관리단이 없으니 이러한 엉터리 조항을 뜯어 고치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또, '전체 주민(소유자)의 과반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도 존재했는데 소유자가 직접 거주하는 비율이 적은 오피스텔 특성상 이는 관리인 선출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었고, 실장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아군이었습니다.
5. 속이 검은 입후보자들
선관위가 구성되고 실장이 '선관위에 통보도 없이 월권으로 발송한 후보 모집 공지'를 통해 5명의 후보자가 입후보 했고, 그 안에는 A씨도 있었습니다. A씨는 다른 후보자들을 설득해 서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라 같이 결속하여 자신이 모은 의결권 위임장을 사용해 다같이 관리단을 구성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관리단 정원은 5명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후보 인원도 5명이었기에 경쟁할 이유는 하나도 없이 주민들의 찬성표만 절반을 넘기면 함께 관리단을 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순수한 의도로 건물을 관리할거라면 말이죠...
하지만 입후보자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우선 5명 중에서 4명이 다른 아파트나 상가 건물의 입주자 대표, 관리인, 관리실장 경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요.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건물을 위해, 주민들을 위해 일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피스텔 건물을 돈줄로 본다는 소리입니다. 관리인이 되면 건물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돈 전체를 관리할 권한이 주어지는데 각종 업체 선정과 구입 과정에서 자기 주머니를 챙길 여지가 어마어마하게 큰 겁니다. 700세대가 넘는 큰 건물이기에 매우 큰 돈이 오가는데 1차 관리인으로 당선되면 감시할 사람이 없으니 손쉽게, 크게 해 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뭉쳐서 사이 좋게 관리단을 구성한다? 그건 힘든 이야기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후보자들은 A씨를 물어 뜯기 시작했고 5명 모두 관리단이 될 수 있는 선거에서 자기가 관리인이 되기 위한 - 자기만 당선되기 위한 선거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6. 사사건건 올바른 선관위 활동을 방해한 어리석은 선관위 아줌마들
실장의 속내를 알아챈 저는 자리에 앉아 서명만 하던 위원장이 아니라 본격적인 선관위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실장이 주도하는 회의 분위기를 깨기 위해 실장 몰래 별도의 회의 자리를 수차례 마련해 선관위 아줌마들을 설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현재 건물관리규약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집합건물법과 집합건물법 해석사례집을 정리하고 주민 의결수 과반수를 넘겨 관리인을 선출할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강구했고, 다른 건물들의 선관위 운영 사례를 모으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렸습니다.
- 실장은 건물관리규약이 집합건물법보다 우선된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을 알아보니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있을 경우 건물관리규약의 내용은 효력이 없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건물관리규약에 적힌 소유자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무효가 되어 점유자(세입자)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선거는 한층 손쉽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 관리인은 전체 소유자의 과반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선 1인 1표로 진행하면 안 그래도 투표율이 적은 마당에 각 후보자에게 표까지 분산되면 관리인 당선은 한없이 0%에 수렴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1표제가 아니라 각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복수선택투표로 하여 다수의 당선인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리인 1인만 당선시키는 선거가 아니라 관리단 정원 최대 5인(회장1, 이사3, 감사1)을 뽑는 선거가 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1인만 관리인으로 뽑히면 그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집중되어 버려 각종 비리를 감시할 수 없어지기에 복수의 인원이 당선되어 각 직책을 나눠가져 서로 감시하도록 만드는 효과도 기대했습니다.)
- 투표율이 저조한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니 우편을 통해 서면 투표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선거일이 당일치기가 아니라 평일과 주말을 낀 일정한 기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것으로도 부족할 것을 고려해 마지막엔 세대 방문 투표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무기한으로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연락을 돌려 의결권 사용을 독려하는 방법, 전화녹음 투표나 중앙선관위 전자투표 도입까지 정말 다방면으로 고려했습니다.
그 밖에 '정당한' 선거로 만들기 위한 세부 조항을 만들어 정리하니 몇 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되었고 이를 선관위 아줌마들에게 배포하고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복수 선택하는 투표 방법만 확정되고 나머지는 싹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아줌마들이 이 내용을 전부 실장에게 까발리며 위원장인 저보다 실장을 따르고, 저와 실장이 대립하는 구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아무리 위원장이어도 정작 위원들이 바른 선거를 만들기 위한 생각을 안 하고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실장 말만 주워담으니 위원장으로서 무엇 하나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실장이 선관위원들에게 홍삼선물세트 한 박스씩 선물하는 것을 좋다고 받아 먹던 아줌마 위원들의 한심한 꼴을 보고는 기운이 다 빠져 위원장 사퇴할 생각도 했죠. 제게도 억지로 떠넘기는 걸 내던지듯 되돌려주고 자리를 떴습니다.
이렇게 선거가 폭싹 망하는 길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7. 졸속 진행된 관리인 선거 투표
위원장 말은 티끌 만큼도 듣지 않고 실장만 믿고 따르는 아줌마들에 의해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이 실장의 주도하에 졸속 선거가 개최됩니다.
우선 실장도 최소한의 선거 형태는 유지하기 위해 우편으로 사전 서면 투표를 받기로 결정하고 우편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걸 또 선거 진행에 아무 권한도 없어야 할 관리실에서 받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저는 딱 잘라 거절하고 임시선관위사무실 공간을 마련해 거기서 우체부를 통해 제가 직접 받아 봉인함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미 망한 선거이고 선관위 주도가 아닌 사실상 관리실 의도대로 선거가 실패되도록 꾸며진 선거지만,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실장 뜻에 따라 회의록에 서명해대는 선관위 아줌마들처럼 추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저 한 명 만큼은 정직하게 활동하며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선거 당일. 간악한 실장과 생각하는 머리라고는 1도 없는 위원들의 콜라보로 인해 평일 낮에 8시간동안'만'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실장은 대단한 선거 했네 하는 증거를 남기려고 현수막까지 만들어 걸고 입회자도 없는 텅 빈 회의실에서 관리실 직원들과 기념사진 찍어대고 개회식까지 하면서 실장과 선관위 아줌마들만을 위한 행사가 개최됩니다. 뜬금없이 위원장인 저보고 개회사 한 마디 하라길래 "이미 실패한 선거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하자"는 덕담을 남겨주었습니다.
결과는 총 투표율 20%. 정말로 폭싹 망한 폭망 선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나마 이만큼 모인 것은 A씨가 의결권 위임해달라고 우편보내고 연락해댄 효과로 선거가 진행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소유자들이 조금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후보 과반수 지지 이전에 전체 주민 과반수 투표조차 달성하지 못했기에 개표 자체가 의미 없어진 무효 선거를 보고 실장은 애써 표정 관리하며 개표하자는 소리를 해대고 위원회 아줌마들은 어쩌지 어쩌지 하고 있고... 결국 제가 나서서 정족 수 미달로 당선자 없다는 문서를 작성해 실장에게 축하 선물로 주면서 개표 없이 마무리 짓고 그렇게 선거가 끝났습니다.
그래놓고는 또 뭐가 걱정이라도 되는지 고작 열흘만에 전화해서 개표하지 않고 봉인한 투표용지들을 파쇄하자고 닥달하는 실장 때문에 아줌마 한 명 데려와서 관리실 파쇄기로 깔끔하게 갈아버리고 그 자리에서 선관위 사퇴하고 제 선관위 활동은 종료하게 됩니다. 3
8. A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반전
선거가 무사히 실장의 바람대로 끝나고 관리인이 공석인 상황이 다시 수 개월 지속됩니다. 저는 선관위 활동을 하며 A씨와 몇 번 연락을 주고받고 직접 만나 대화도 해봤기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선거가 끝난 뒤로는 딱히 연락을 할 이유도 없어져서 한동안 소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A씨가 제게 찾아와 자기가 만든 주민 명부 일부를 인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프린터가 없어서 빌리러 온 건데, 문서를 자기 이메일에 저장해두었기 때문에 제 노트북으로 로그인해서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인쇄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저는 남 프라이버시라 가급적 이메일을 안 들여다보려고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음에서 A씨가 참 답답하게도 인쇄만 하고 메일 화면을 안 닫고 그대로 가버린 겁니다. 그 탓에 본의 아니게 남의 이메일을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저는 거기서 A씨가 모 건물 관리업체와 자료를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A씨는 혼자서 소유자들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어 설득하고 위임장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착실히 다른 관리업체의 백업을 받아가며 일을 진행해왔던 겁니다. A씨가 당시 어딘가의 건물 관리 직원으로 막 취직한 것은 파악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될 줄은 그때까지 생각도 못 했었습니다. A씨는 관리인이 되면 이 오피스텔의 관리실을 쫓아내고 그 관리업체와 계약하는 조건으로 백업을 받고 있었고 그대로 그 업체에도 취직해 월급도 받는 관계를 맺은 겁니다.
관리인이 되기도 전에 이미 내정된 관리업체가 있는 이런 상황이 법적으로나 무언가 규정상으로나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뒤로 착착 주민들의 위임장을 얻어내어 결국 A씨는 건물이 들어서고 2년 반만에 첫 관리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9. 결국 걸린 A씨와 실장과의 소송전, 싱거운 승리
A씨가 관리인이 되고 얼마 못가서 관리실은 예정된 수순대로 모 관리업체가 이어받게 되는데, 그 뒤로 실장과 A씨 사이에 작은 소송전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당사자는 아니고 굳이 내용과 결과는 묻지도 않았지만 소문에 의하면 A씨 측의 손쉬운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더군요.
10. 그로부터 2년
그렇게 A씨가 관리인이 되고 2년이 지났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확실히 새로 들어선 관리실은 이전보다 일을 열심히해서 방치되어왔던 쓰레기 더미로 가득했던 재활용 처리 공간을 개선하고 외부 방문객을 위한 건물 간판과 내부 안내 표지판 설치, 어째선가 지은지 2년도 안 되어 퀴퀴해졌던 건물 외벽 창문 청소, 배수 시설 정비, 지저분하고 악취로 가득했던 상가 화장실 개선, 야간에 깜깜했던 외부 조명 설치, CCTV 사각지대 제거, 철저한 직원 교육, 기타 하자보수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긍정적인 효과가 많은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생각하고는 하죠. 표면적으로는 일을 잘 하지만 이번 관리실, 그리고 관리인 A씨는 정직하게 건물을 관리해나가고 있을까, 하고. 관리인이 되기 전부터 이어져 있던 '유착관계'가 정말 문제가 없을지. 장부 작성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는지. 각종 외부 업체 계약에는 뒷돈 없이 관리비 절약을 위해 깨끗하게 진행되는지...
사실 2년 전 A씨로부터 제게 관리단을 같이 하자는 권유가 왔으나 거절했었는데 만약 그때 수락을 했다면 과연 저는 A씨와 함께 성실하게 일을 해오고 있을지, 아니면 A씨와 함께 거래업체 뒷돈 챙기는 재미에 들려있을지 궁금한 일입니다.
11. 소소한 옆 이야기
마침 당시 입후보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우연히도 제 본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며 그곳의 역대 입주자 대표, 동대표, 선관위원장 등등 각종 직책을 6년 이상 이어서 해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파트의 노후화된 실내 장치 공동구매 건으로 어느 업체에서 나와 물건을 교체하다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업체의 제법 높은 직책에 있던 사람이 상태 점검을 하면서 부하직원에게 "B위원장 댁에 있던 그거랑 다르다."는 짧은 내용이었지만 듣는 순간 업체와 B씨 간에 무슨 거래가 있구나 하는 것이 팍 와닿더군요. 왜냐하면 그날이 교체/점검 첫날이었고 그 첫 방문한 집이 저희 집이었기 때문인데, 이미 그 사람의 집에 이 사람들이 들렀다는 것은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또한 해당 업체와 이 아파트는 이번이 첫 계약이고 그 사람은 입주자 대표, 동대표가 아니라 선관위로 직책을 옮겼는데 여기서 왜 그 사람 이름이 나오는가 하는 겁니다. 이 아파트도 직책있는 사람들과 금전적, 물질적 무언가 오가는구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거 준비중에 저한테 슬쩍 자기가 관리인되면 관리업체부터 변경하겠다고 속내를 드러냈었는데 자기 변호사도 데리고 있고 완전 이쪽으로 꾼인 모양새였습니다.
입후보자 C씨는 제출한 경력이 독특해서 흥신소마냥 과거 이력을 좀 조사해봤더니 학원 운영하다 잘 안 되니 보험팔이를 했고 그 와중에 모 아파트 입주자 대표가 되었는데 거기서 뭔가 느꼈는지 2년간 준비해 어느 건물 관리소장으로 취직한 인물입니다.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건물에서 돈 돌아가는 거는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실거주지도 아닌 이곳 오피스텔에 관리인 후보로 입후보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어째선지 선관위에서 공지도 안 한 회의 내용들이 속속 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는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출처는 실장이었습니다. 이쪽 저쪽 건물 관리하는 사람들끼리 한통속이었던 겁니다.
선관위 이름으로 발송된 선거 일정 안내문과 후보자 소개 우편에 그 실장은 또 자기 멋대로 광고물을 집어 넣는 추잡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인근 부동산 돈 받아 먹고 선관위 우편물로 부동산 홍보를 한 거죠. 실장 찾아가서 이게 뭐냐고 물으니 천연덕스럽게 운영비 아끼려고 후원받았다는데 참 사람이 지저분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관위 활동비 내역 장부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조언가 역할을 자청한 권위자라고 할까 유력자라고 할까... 하는 인물과 만나고 통화하기도 여러 번 했었는데 뭐 음... 이 이야기는 자세히 안 하는 게 좋겠군요. 처음엔 이 사람이 워낙 말 잘하는 달변가라 한동안 의지가 된다고 느껴 이것저것 조언을 구했는데, 사람을 설득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 천재적인 것이더군요. 이분은 건물 하나 정도의 물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지역 단위로 노는 분이었고, 후보자중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 평생 장기말 같이 사용되는 존재였다는 것이 재밌는 부분입니다.
그 밖에도 선관위 하면서 정말 지저분한 꼴을 잔뜩봤습니다. 고작 건물 하나를 둘러싸고 국가 정치 축소판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죠. 단기간에 몇 년은 늙는 것 같은 체험을 했고 공부가 되었는데 이런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가 않군요. 세상 보는 눈이 염세적이게 되고 지저분한 생존방식이 옮을까 두렵습니다.
다른 오피스텔의 관리인에 관한 이야기가 적힌 기사가 있어 링크겁니다.
http://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28
http://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27
- 오피스텔 시공사가 오피스텔 관리실의 계열사입니다. 자기들이 건물 짓고 계열 관리회사를 꽂아 넣고는 그 체재가 유지되도록 엉터리 건물관리규약을 만들었던 것이죠. 건설 대기업임에도 하는 행태가 이렇게 지저분합니다. [본문으로]
- 예전에 모 심리학자가 소송이라는 단어를 쓰는 그 자체만으로 사용 상황에 따라서는 협박이 될 정도로 사람들을 위축시킨다고 했던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 봉인된 투표함 안에는 선거가 개최되기까지 끝끝내 선관위에 제공하지 않은, 주민들의 '실거주지 우편 주소'가 적혀 있는 편지 봉투가 100여장 들어 있었는데 혹시라도 그것이 새어 나가서 A씨에게 전달되는 것이 실장의 걱정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A씨가 주민들의 주소를 알게 되면 관리인 지지를 위한 의결권 모으기가 훨씬 수월해지니 말이죠. 주소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우편을 관리실에서 받겠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일 테고요. [본문으로]